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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물거래소 유치백서 발간

돌이켜 보면 부산상의회장에 취임할 당시 부산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산은 1960~70년대 합판 가발 섬유 등의 업종이 호황을 구가했고, 이런 업종이 사양화되는 시점에는 신발이 그 뒤를 이었기 때문에 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경제를 견인했다. 왕성한 산업활동을 하는 도시였다.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로 고임금이 되면서 신발공장마저 국제경쟁력이 약화돼 도산하거나 동남아 등지로 이전했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상의회장 선거 때 선물거래소와 삼성자동차 유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부산의 공장용지 공급이 한계에 다달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진국형 산업인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부산발전시스템연구소 이사장인 강경식 의원의 생각도 같았다. 
 
그래서 강의원의 도움도 받으면서 1994년 4월 초 취임하자마자 재정경제원을 방문, 선물거래소 유치에 시동을 걸었다. 마침, 오세민 부산정무부시장이 前 경제기획원 출신이어서 친정집인 재경원에 갈 때 동행을 해주는 등 큰 힘이 됐다.
 
당시 김영섭 금융정책실장이 선물거래법(시안)을 그 해 9월 정기국회에 상정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김실장에게 “선물거래소 입지가 부산이 아니면 안되도록 해서, 본사가 반드시 부산에 오도록 법안에 넣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금융정책실장이 윤증현씨로 바뀌고 나서는 더 집요하게 재경원을 찾았다. 그럴 즈음에 이환균 재경원차관으로부터 선물거래소외에 코스닥 법안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자본금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더니 50억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코스닥을 선물거래소와 함께 달라”고 했더니 “코스닥은 규모가 작다. 작은 것을 가져가면 그보다 훨씬 큰 선물을 놓친다.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물거래소 유치가 거의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재경원에 강만수 차관이 와서 부산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김영섭 윤증현 이환균 강만수 강경식, 이런 분들이 전부 부산 경남 출신들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심도 있게 세부적 논의를 할 수 있었고, 또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1997년 11월에 재경원 수장이 강경식 부총리에서 임창렬 경제부총리로 교체됐다. 
 
DJ는 이보다 조금 앞서 그해 10월 초에 부산상의가 주최한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했다. 나는 그 때 마이크를 잡고 수도권과 지방의 심각한 불균형을 지적하면서 선물거래소 유치를 선거공약 1호로 채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선물거래소 부산 설립은 국민의 정부 지방공약 제 1호로 채택됐고, DJ는 TV대담을 할 때도 대통령만 되면 부산에 꼭 설립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김원길 정책위의장에게 부산 설립을 지시했으나  재경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임부총리가 앞장 서서 반대했다. 심지어 자기 방으로까지 불러들였다. 재경원측에선 임부총리와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등이, 부산에서는 나와 오세민 부시장, 조병옥 부은선물 사장 등 3명이 참석했고, 서울 측에선 배정환 선물협회 회장, 권승우 선물거래소 설립준비단장 등이 참석했다.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 2시간동안 난상토론을 벌였고, 심지어 고함 소리도 나왔다. “부산에 갈 수 없다. 포기하라”는 압력도 받았다. 


DJ 집권 후에는 재경원에서 이름을 바꾼 재경부의 이규성 장관을 찾아갔다. 당시는 대통령이 부산 설립을 지시하고 난 후였다. 그러나 재경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른바 DJP연합이 만든 국민의 정부에서 재경부는 JP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장관은 “어떻게 부산에 갈 수 있나?”라고 했고, 나는 “선물은 지점에서 일을 한다. 본사는 독도나 제주도라도 괜찮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DJ가 당정 주례보고 때에 김원길 정책위의장에게 공개적으로 지시를 했는데, 그것이 3번째 지시였다. 김정책위의장은 기업가 출신으로 후덕한 분이었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박광태 제2정책조정실장(광주시장 역임)에게 선물을 부산에 설립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그래서 박실장 주선으로 간담회가 열렸다. 부산 측에서는 나와 최인섭 부시장, 조병옥 부은선물 대표, 김명수 부산상의 조사부장, 배광효 부산시 경제기획계장 등이 참석했다. 또 국민회의 측에서는 박실장과 송치순 전문위원이 나왔고, 선물협회측에선 조진형 선물협회 회장과 권승우 설립준비단장 등이 참석했다.  
 
박광태 실장은 거구였고, 배짱이 두둑한 분이었는데 거의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승낙을 받아냈다.
그 후에 부산시는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상의는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했다.


부산시민들은 처음에는 ‘선물(先物)’을 선물(膳物)로 잘못 알고 “그것 때문에 왜 시끄러우냐”면서 의아해 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다 알게 됐다. 선물거래소 유치를 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적극적 협조에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특히 언론의 협조가 컸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유치활동을 하는 기간에 나는 주로 서울 쪽의 움직임이나 청와대 정당 정부 쪽의 큰 흐름을 주시하면서 정 ? 관계 인사들을 만나 정책적 ? 행정적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주력했다. 그 외는 성병두 부산상의 상임부회장이 업무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획과 집행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챙겨주었기 때문에 유치가 가능했다. 성부회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상의회장 9년간  어떤 중요한 일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상의 임직원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선물거래소, 또 그 후의 한국거래소를 밑그림으로 삼아 부산이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데 이어, 언젠가는 부산이 목표로 하는 동북아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 금융도시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산을 국제금융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 무엇보다 든든하다. 특히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 부산금융도시시민연대 대표 등을 맡아 오랜 기간 열정적으로 추진해온 조성렬 ? 박인호 교수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많이 분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남식 부산시장과 신정택 부산상의 회장을 위시한 관련 기관 및 단체장들의 큰 관심과 지원이 이같은 희망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산상공회의소 15~17대 회장

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2011년 12월 23일 발행 유치백서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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